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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죽음을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했던 선학들은 인생의 지리 멸렬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자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에 사후의 명성 따위는 당사자에게 가치가 없다.

단풍잎이 떨어져 물에 흐르지 않았다면
타츠타 강물의 가을을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사카노 우에노 고레노리)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퍼듀대학교 교수가 학교 강의를 들으면 강의시수 한개를 빼준다.

힘은 너무나 약했고, 목표는 아득히 멀었다. 목표에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 목표가 시야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게 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베르톨트 브레히트)

분노나 폭력이나 강제는 위력이 잘 작동할 때보다는, 위력이 무력해진 것을 깨달은 장의 증상으로 보였다.

적폐란 무엇인가
대학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자격증 시험 감독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종이 올리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종이 울리기 무섭게 수험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부정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험 문제를 풀다가 유혹에 못 이겨 어쩌다 남의 답안을 슬쩍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당연하다는 듯 서로 답안지를 보여주고, 책을 꺼내 보곤 했다. 그 뻔뻔함에 당황해서 우왕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으나, 나는야 이제 성인식을 마친 대학생. 다 큰 어른답게 정신을 수습하고 부정행위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남의 답안을 보지 못하게 통제하고, 각자 시험 문제 풀기에 집중하도록 부지런히 시험장을 오갔다. 이상하게도 수험생들은 이러한 시험 감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마치 부정행위자는 자신들이 아니라, 시험 감독관 바로 당신이라는 눈빛으로, 나도 이제 어른인데, 이토록 카리스마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쿠테타를 일으킨 신군부처럼 권총이라도, 아니 헤어드라이어라도 허리에 차고 와야 수험장의 기강이 잡히는 걸까. 어쨌거나 나는 수험생들의 뚱한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격히 시험 감독을 해나갔다. 결국 시험이 끝났고, 답안지를 걷기 시작했다. 답안지를 걷는 뒤통수로 수험생들은 소리를 질러 댔다. 우우. 늑대들의 하울링이 수험장에 울려 퍼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호기심마저 생겼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도대체 왜들 그러냐고, 그들은 하울링을 멈추고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말에는 그 나름의 이치가 깃들게 마련이다. 과연 수험생들은 '부정행위를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건데 왜 상관이죠' 하거나 '우리가 다수니까 옳아요'라고 강변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헛소리 태피스트리를 짜기 시작했다. 첫째, 지금껏 다들 이렇게 부정행위를 하며 자격증 시험을 치러왔단 말이에요~ 그건 '관행'을 통해 부정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논변이었다. 둘째, 오늘 다른 수험장에서는 다들 이렇게 부저행위를 하며 시험을 쳤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부정행위를 하지 못한 우리들이 결과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며, 따라서 당신의 시험 감독은 공정하지 못했어요! 이것은 독특한 '정의론'을 통해 부정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논변이었다. 그렇군, 태초에 부정행위가 있었으리라.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사람이 있었으리라.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대가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이의 충성을 얻고, 그 충성에 기초해서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누렸으리라. 그 과정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거래에 동참했으리라. 그리하여 부정행위의 용인이 쌓이고 쌓이자, 그 적폐는 관행이 되었으리라. 급기야는, 그 관행에 한통속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었으리라. 미치 자기 혼자만 교통질서를 지키다 보면 목적지에 남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위장전입, 이중국적, 전관예우, 남발되는 자격증과 상....그것들을 못 하게  하면, 강변하는 거다. 다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갖고 그래, 불.공.평.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부정행위가 관행을 넘어 정의의 반열에 올랐으리라. 시험 감독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다 눈에 들어온 하늘의 구름은, 신이 건네준 솜사탕이 아니라 신이 흘린 게거품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시험 감독 아르바이트에 응하지 않았고, 어른이 될 용기를 상당 부분 잃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그런 난감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무익한 기간을 거쳤다. 그 기간이 끝나고 이 사회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낄 무렵. 어디로부터인가 적폐청산을 목표로 하는 정권이 등장했다.

이 땅에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기에 희망을 가진다.

신분상승과 신분해방은 별개다. 신분상승의 열망은 현존하는 신분체제 내에서 자신이 신분의 사다리를 빨리 타고 오르겠다는 것이고, 신분해방의 열망은 그 사다리 자체를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진정성이란 개인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사의 양식일 뿐,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직공원을 지날 때면 뜬금없이 인간이 된 곰이나, 상당수가 노비나 소작농이었던 어떤 조공국 왕조의 정치신학이나, 일제가 진행한 타율적 근대화 시도 대신, 입시교육을 벗어난 몇몇 학생들의 조초하지만 자발적인 '근대화' 시도를 지원했던 시립도서관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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